도서

상식의 독재

범우s 2025. 2. 9. 17:23

상식의 독재를 읽었다. 그간 윤석열이 구속이 되고 극우성향의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크게 걱정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윤석열이 구속된 상황은 기득권에서 암묵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의미로 읽힌다. 구속을 진행한 법조계 인사들의 향후 안위를 위협하거나 내란 사범들의 자리를 치고 올라갈 사람들의 정당한 보상 심리를 쉽게 꺾지는 못할 것이다. 극우 유투버들의 방송에 영향을 받은 난동범들은 아마도 적절한 처벌을 받고 잊혀질 것이다.

 

탄핵은 인용되고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것이다. 그 자리에 현재 지지율 1위인 이재명은 호감도가 30%를 겨우 넘는다. 비호감도는 호감도 보다 더 높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국민들도 192석의 야당 의원의 수를 보면 쉽게 이재명을 선택하진 못할 것 같다. 돌이켜보면 국민들은 항상 최선의 선택을 했다.

 

이재명과 윤석열 중에 초보자인 윤석열을 대통령에 올리고 막상 국회의원들을 선출할 때는 야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윤석열과 야당의 극단적인 성향을 보면 협력은 힘들어 보였다. 윤석열 단독의 정치적 선택은 더더욱 힘들었다. 실질적인 양당제 정치에서 양당이 국민들에게 매력적이지 않는 선택지를 제공했을 때 국민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보다 제거가 손쉬운 쪽을 선택해서 그냥 임기동안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했다고 본다.

 

지나고 보니 1987년 전두환에게서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낸 국민들은 야당의 두 거두가 협력하지 못하자 노태우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때도 국회의원들은 여소야대로 밀어주었다.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의 삼당 합당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커다란 비극이 일어나지 않고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 있었다. 노태우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쿠데타의 한 축을 헐어내야 했다. 이후 김영삼은 남은 하나회를 제거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한 번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전두환 이후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다시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 정치적인 상황이 그다지 깔끔하지 않고 추해 보인다. 노무현과 문재인 대통령은 로마사의 그라쿠스 형제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가난해진 다수의 시민들에게 토지를 주어 부를 재분배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개혁은 기득권의 반발을 불렀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 이후로도 귀족파와 민중파의 싸움은 치열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정쟁이었다. 내부 정쟁은 전쟁과 경쟁 사이에 위치한다. 과열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혈사태가 일어난다. 누가 봐도 정치가라기보다 폭력배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시기가 있었다. 나는 윤석열과 이재명의 시기가 완전하게 같지는 않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윤석열의 지지자가 법원을 습격한 일과 이재명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폭력배가 문재인 대통령이 운영하는 서점의 여성 직원을 테러한 일들이 그렇게 느껴진다. 로마는 내부 문제를 외부와의 전쟁으로 풀었다. 귀족정인 공화정이 몰락하고 제정의 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주변에 정복할 땅이 있어 제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의 입지는 삼면이 바다고 대륙으로 연결된 부분도 철책으로 막혀있다. 대한민국은 제국으로 나아갈 입지가 아니다. 주변국들도 국가의 피해를 걱정하지 않고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대한민국에게 독침 전략과 평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연이다.

 

그래도 당장 2차 계엄의 위험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언제 위태롭지 않았던가. 역사 속에서 전란 사이의 평화는 상호 간의 교훈을 바탕으로 잠시동안 이어졌다. 역사적인 빈도를 보면 오히려 지금의 평화 기간이 긴 축에 속한다. 인류의 역사가 평화를 지향하며 발전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같은 산의 다른 면을 바라본다고 보면 전쟁사라고 본다.

 

상식의 독재라는 책은 한윤형 작가의 책이다. 작가 이름은 몇 번 접해 보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깊이보다는 시류와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시류와 트렌드도 중요하긴 한데 내가 메인스트림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유튜브를 하다가 한윤형 작가를 보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기질 차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한국인에게는 구석기의 문화가 남아있는 이유가 청동기를 든 정복자가 선주민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일정 부분 타협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의 선주민에게 도래인이 들고 간 것은 철기였기 때문에 구석기적인 기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의 모럴을 여러 개의 겹으로 표현한 것도 그럴듯하고 현대 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 구석기까지 추론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요즘 들어 부쩍 한국인 우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잦아진 것 같다. 우리는 누구이며 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내려는 시도들도 많아졌다. 이 땅에 국가가 세워진 이래 상시적인 소멸의 공포가 있었던 듯하다. 언제나 태평성대를 꿈꾸지만 항상 위험은 잔존하고 있다. 지금도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과 보수를 참칭 하는 세력들은 상대방이 집권할 때 국가 존속에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정말 밑바닥의 민초들이 움직임이 가시화될 때 국가 존속이 위험해진다고 생각한다.

 

요즘엔 인구절벽에 의한 소멸을 걱정하는 의견들이 많다. 기득권이 특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대책은 없다. 외력에 의한 국가 소멸이 아니라 개별 단위의 민초들의 포기가 합산된 결과다. 그 와중에 한국문화에 대한 열풍이 세계에서 불고 있다. 이제는 우리를 다른 나라들이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이런 괴리감이 우리는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사는가 하는 질문을 불렀다고 생각한다.

 

책은 장르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작가 개인의 성장기 같기도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시류에 대한 해석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것이 정답인가에 대한 의구심은 남는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비슷한 글을 한 꼭지 적어보고 싶기도 하다.

 

이제부터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첫 국가는 고조선이다. 처음 사람의 수가 드물던 시기에 분쟁이 생기면 피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굳이 동종끼리 필사적인 싸움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야생에서는 작은 부상도 치명적이다. 넓은 땅 구석구석에 사람들이 들어차고 난 후에 갈등을 피해 물러설 땅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순간이 왔다. 동등한 조건의 물리적 싸움에서 인구수는 중요하다. 이합집산의 결과로 처음의 국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새로운 지배 세력과 기존 지배계층의 합병을 암시한다. 아마 청동기 문명과 신석기 문명의 조우였을 것이다. 우열을 가늠할 수 있지만 필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에 더 강한 적이 있다면 동맹은 필연이다. 고조선을 중국의 한나라가 멸망시킨 결과를 보면 그 적이 중국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인구비례가 월등한 중국과의 싸움이다. 냉무기를 든 시대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홍익인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건국이념이다. 사람이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 본능이듯 사람이 만든 조직은 존속을 추구한다.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 외적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병력이 되어줄 인구, 혹은 병력을 낳아줄 인구, 그도 아니면 서포트해 줄 인구는 항상 소중하다. 자신보다 강한 적과의 전쟁을 고민했던 고구려와 백제의 무덤에서 순장의 흔적이 없다. 인구가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중국에서는 명나라까지 순장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안다. 중국역사에 크게 밝지 못해 청나라 까지 순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청나라의 부호나 귀족들이 순장을 했다 해도 크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이 살아온 경험이 성격을 형성하는 것과 같이 한 민족이 겪어온 역사가 민족성을 만든다. 고조선이 멸망 후 잔존세력들은 남하해 삼한을 만든다. 부여와 그 뒤를 이은 고구려는 한나라가 남긴 유산과 싸워 이긴다. 한국인들이 평화를 말하면서도 광개토 대왕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내심은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국과 싸워 이기는 것을 장담할 수 없기에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항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힘이 필요하다.

 

고구려는 요동에서 멈췄지만 중국은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 드렸다. 지정학적으로 위험한 위치에 단일한 정치 군사 세력은 중대한 위협이다. 중국이 고구려에 대한 공격은 집요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치고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한반도 전체를 원했다. 신라가 당과 손을 잡은 것은 존속하기 위함이지 당의 속국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싸웠다. 더 미운 놈과 싸우기 위해 덜 미운 놈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도 함께 싸웠기에 신라가 존속할 수 있었다.

 

현대인이 보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 국가다. 신라는 조금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 국가 형성 초기에 신라는 연맹의 성격을 가졌다. 내부 정치투쟁에서 김 씨가 승리하고 골품제를 만들어 완고한 신분제 사회를 만들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이 문화적 혹은 사상적인 부분들도 이식했을 거라 본다. 고구려의 온달장군 이야기를 보면 신분제 사회지만 간혹 신분을 뛰어넘는 능력도 인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닫힌 사회였던 신라는 조금은 열린 사회가 되었다. 장보고의 청해진을 그렇게 이해한다.

 

기득권에게 포용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신진 세력은 위협으로 간주된다.. 장보고는 그렇게 죽었고 청해진은 와해되었다.. 장보고를 죽인 신라도 꼴이 좋지는 않았다. 누적된 사회 문제는 국가를 해체직전으로 몰고 갔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었다. 유독 신라에서만 순교자가 나온 후에 기득권에게 인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에게는 용납되는 무언가가 신라 사회에서는 금기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토속종교의 제정 분리가 고구려 백제보다 덜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골품제로 귀결된 신분제의 사회적 압력이 가장 아래쪽의 사람들에게 무게감을 주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장보고가 나왔을 때 열광했을 것이다. 기존사회의 기득권과 공존을 꿈꾸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와해되었다.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왕건의 지지 세력이었다던 해상세력이 그들의 후예다.

 

왕건은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내세웠다. 모든 사람의 속에는 불성이 있다. 그러니 지금 신분으로는 귀하지 않아도 귀한 존재다. 홍익인간과 궤를 같이하며 조금 확장된 건국이념이다. 보통 원시사회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부족원만을 말하기가 쉽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그러니 신라 말기에 후고구려 후백제가 만들어지고 강성한 위력을 발휘했다. 강성했던 후백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견훤은 지렁이의 자손이 되었고 왕 씨는 용의 후손이 되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용이 되었다는 신화를 보면 통합 과정에서 신라의 지배층은 고려에 녹아들었다. 융합이 성공적이었기에 고려가 아무리 위기에 처했을 때도 신라의 재건을 외치는 목소리는 없었다.

 

고려가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 발해의 유민들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거란과의 전쟁 과정에서다. 학자들 중에는 우리에게 민족의식이 형성된 기원을 임진왜란 이후로 파악하는 사람이 있고 몽고와의 항쟁기간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거란과의 전쟁 기간도 충분히 내부적으로 융합될 만한 시기다. 특히나 고려 현종은 불교적 교리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심취한 군주다. 건국이념이 통치이념이 되어 전란의 시기를 잘 어루었다. 가시적 종교 행위로 대장경을 만들고 현실적 전쟁 준비로 귀주대첩을 준비했다.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압도적 물량의 중국에게 멸망한 것은 집단기억으로 남았다. 고구려부터 이어지는 중국과의 전쟁전략은 방어전이다. 청야전술로 끌어들인 적군을 최대한 몰살시키기 위해 산성이 발달했다. 산성에서 장기간 농성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은 신분을 떠나 구성원들의 유대감을 증진시킨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나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냉병기 시대의 흔치 않은 섬멸전이다.

 

현종의 현명한 전후처리 이후 긴 시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위기 상황이 지나면 욕심이 자라게 된다.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과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본능에 가깝다. 고려말의 권문세족도 마찬가지다. 음서제도로 특권을 상속하고 더 많은 토지를 끌어모았다. 고려사회는 로마의 그라쿠스형제가 토지개혁을 외치던 구조적인 모순과 비슷한 모습을 갖추었다. 노비를 해방시켰던 신돈의 개혁이 어쩌면 그에 비견될지도 모르겠다.

 

로마의 주변은 강대한 적이 없기에 정복 전쟁으로 내부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고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중국과 북방 이민족들은 고려보다 약하지 않다. 계속해서 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혁명에 가까운 내부개혁이 필요했다. 고려의 지식인들도 필요를 느끼고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불교는 더 이상 유용하지 않았다. 언젠가 미륵불이 다스릴 불국토건설에 쓰일 목적으로 바닷가 갯벌에 묻어두었던 침향목들은 비만 남기고 잊혀졌다.

 

천하의 주인을 끌어내리기 위해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공자와 맹자의 성리학이다. 용손을 끌어내리는 역성혁명을 위해서는 그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필요했다. 아무리 우왕이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피를 이었다는 선전전을 해도 역성혁명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나라 조선의 주인은 사대부가 되었고 천하의 주인은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었다. 주인은 권리를 가지지만 어버이는 자녀에게 책임도 가진다. 고려의 백성들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점이 조금씩은 있는 존재였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가장 고귀한 분의 자녀가 되었다. 일단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어버이로서 군주가 가진 책임감의 극치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다. 지배층의 청렴과 자기 수양을 강조하던 유교의 가르침은 조선 건국 후에 대대적인 사회적 재분배를 실시하도록 했다. 노비문서와 토지대장이 불태워졌다. 나름 합리적 재분배 이후 세율도 낮아졌다.

 

임진왜란은 항시 중국과 북방 민족의 침입만을 크게 경계하던 조선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오랜 전국시대의 내전을 종결지은 일본은 넘치는 무력을 바깥으로 투사했다. 일본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는 조선이다. 일본의 귀족 가문에는 고구려 유민도 있고 백제의 유민도 있다.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항쟁보다 신세계로의 이주를 택한 가야의 선주민들도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환경과 사는 모습이 달랐다. 왜구는 있었지만 국가적인 사활을 걸어야 하는 대규모 침략은 처음이었다. 오랜 전란으로 단련된 일본군과 평화시기가 길었던 조선군의 전력 차이가 초반의 패배를 불렀다.

 

왕은 달아났지만 의병이 일어났다. 이순신과 의병이 일본군을 물리쳤다. 석연치 않은 이순신의 죽음도 돌아가려는 일본군을 최대한 많이 죽이기 위한 전투에서 일어났다. 육전과 해전으로 위치는 달라졌지만 전쟁에 임하는 본질은 같았다. 이 정도면 이제 민족성이나 디엔에이라고 불러도 된다. 오랜 전란이 조선 땅에서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른다. 이 시기에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은 일본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동양의 도자기에 심취했던 유럽에 팔렸다. 이렇게 모인 자본이 훗날 산업사회로의 전환기에 자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에도 세대마다 참변을 겪었다. 병자호란과 경신 대기근은 조선사회를 아우르고 있는 사회적 합의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예를 들자면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과 같다. 천지가 뒤집어지는 경험을 겪고 나면 기존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 형성된 불합리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쩌면 조선의 인구가 1차 산업으로 부양할 수준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엄격해진 신분제가 무너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세도정치로 다시 부가 권력자 집단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고려말의 사회불안과 닮은 꼴이 되었다. 유교의 가치와 비전은 더 이상 효용이 없다. 그즈음에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서책을 공부한 이들 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나타났다.

 

천주교의 교리상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다. 모든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과 거기서 거기인 것 같지만 글로만 해석하면 신분제조차 부정하는 교리다. 효용이 다한 철학과 체제를 대신할 새로운 종교가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사를 거부하는 급진적인 행동은 기득권의 제지를 받았다. 조선은 천주교 역사상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순교자가 나타난 나라다. 천주교는 한동안 금기시된다. 너무 많은 피가 흐른 탓인지 교황은 이 땅의 교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다.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인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신의 자녀라는 서학이 안된다면 모든 사람이 하늘을 품고 있다는 동학은 어떨까? 왼쪽 궁둥이와 오른쪽 엉덩이의 차이 같지만 동학은 농민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진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지친 농민들의 갈증이 있었다. 동학운동은 실패했다. 동학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왕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과 협정을 맺은 일본군이 조선땅에 무장병력을 보냈다.

 

조선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동학은 진압해야 할 민란이었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의병장들처럼 가병을 거느리고 민란에 참가한 폭도들을 제압하려 한 양반들도 있었다. 소년 김창수는 그 과정에서 안진사에게 거두어져 자라게 된다. 동학과 유교적 가르침을 받아 군왕에 대한 충성을 간직한 청년 김구는 국모 시해의 원한을 갚기 위해 일본 밀정을 주막에서 때려죽인다. 그런 그가 훗날엔 민주주의자로 사상전향을 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으로 기억된다.

 

민중봉기인 동학이 다시금 재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이후다. 박정희의 아버지는 동학의 접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력이 있다. 소작농의 자식이었던 박정희는 집권 초기 기득권들에게 빨갱이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출신을 잊지 않았다. 권력에 중독되기 전 박정희는 괜찮은 지도자였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장보고의 해상 세력이 고려의 건국세력으로 흡수되었다는 이야기도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신돈의 개혁이 고려의 마지막 자구 노력이었듯 동학운동이 조선의 마지막 자구노력이었을 것이다. 외세를 안방으로 불러들인 왕실은 결국 망했다. 왕국마저 망하니 국민들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다시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 일본의 생각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백제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일본 황실의 생각은 어쩌면 고토 회복이었을 것이다.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항일 무장 투쟁세력이 되었다. 시류에 적응해서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 다수이긴 하다. 2등 국민으로 사는 것이 꼴 받긴 해도 3등 국민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언젠가는 11등 국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개신교가 그즈음 퍼졌다. 서학은 정부가 박해했고 동학은 기득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죽였다. 국가는 이제 일본의 눈치를 보고 일본은 서양 선교사 그중에서도 미국 선교사는 꺼려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고 머슴을 살아도 대갓집 머슴을 살라는 속담이 있는 나라다.

 

개신교는 기댈만해 보였다. 신채호가 왜 조선에 들어온 종교는 다 그 모양이냐는 한탄을 했지만 암울한 시기에 암울한 시선으로 역사를 보다 보니 그리 보였을 뿐이다. 그 종교가 득세하던 시대에는 다 그만한 효용가치가 있었다.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실리로 접근한 사람도 있었다. 새로운 세상의 살천 철학으로 받아 드린 사람들이 계몽운동과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안산 상록수에 무덤이 있는 최용신 같은 이들이 조선땅에 한둘이 아니었다. 유한양행의 창립자인 유일한 박사를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보낸 그의 부모도 그 뜻을 이어받아 유한양행을 만든 유일한 박사에게도 기독교 정신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자녀인 동포를 가엾게 여기고 이롭게 하려는 의지 말이다. 여호와라는 신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계명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단군이란 이름은 당골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당골은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몽골의 천신 신화인 텡그리와 어원이 같다는 학자들도 많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무속신앙을 배경으로 한다. 신채호의 말대로 이 땅에 들어온 종교는 일관적으로 변형되어 방향성을 보인다. 천신을 섬기는 무속은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고 불교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불성이 있다는 가르침으로 유교는 모든 백성이 어버이인 임금 아래 한 가족이라고 가르쳤다. 기독교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란다. 종교가 효용을 다하고 이기의 끝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은 어쩌면 사람이 나고 죽는 것 같은 숙명이다. 지금은 무속과 불교 기독교를 믿는 비율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유일신을 믿는다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점복을 보러 다니기도 한다. 

 

조선 멸망 이후 한국어를 쓰는 어족집단은 몇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누어졌다. 역사와 언어와 핏줄을 공유하지만 우선 북한과 우리의 정서가 전혀 다르다. 사회의 구조적 우열의 차이지 구성원들의 역량 차이는 전혀 없다. 조선족과 고려인들의 정서도 크게 다르고 재일동포들의 정서도 많이 다르다.. 역사는 방향성은 목적의식을 갖지 않는다. 지나온 역사에서 흐름을 찾아내는 것은 인간의 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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